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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해외

[29일 / 1958년] 펠레, 브라질에 첫 축구 월드컵 트로피를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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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역사에서 최고의 선수(GOAT, the Greatest player of All Time)라고 평가받는 이는 브라질의 펠레가 될 것이다. 그의 본명은 ‘에드슨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Edson Arantes do Nascimento)이다. 그가 학창 시절에 당시 ‘바스코 다 가마’ 구단의 골키퍼 빌레(Bile)를 펠레로 잘못 발음하는 바람에 친구들이 그를 놀리기 위해서 ‘펠레’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그 별명이 그의 본명보다 더 알려져 이름이 된 것이다.

1961년 당시 브라질 대통령 ‘자니오 쿼드로스’(Janio Quadros)가 펠레를 ‘국가적 보물’(National Treasure)로 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럴 정도로 펠레가 브라질의 영웅으로 대접받는 이유는 바로 그가 17세 나이로 참가한 첫 월드컵 대회인 1958년 스웨덴 대회에서 맹활약해 브라질에 첫 월드컵 트로피를 안겼기 때문이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브라질 국가대표로 뽑혔지만 펠레가 17세 어린 나이이고 성인 국제대회 경험이 없어 처음부터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브라질 대표팀의 심리상담가로 활약한 주앙 카르발랴이스 박사가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앞서 보고서에 “펠레는 갓난아기다. 그에게서는 월드컵에서 뛰는 데 필요한 투혼이 없다. 상대 거칠게 들어왔을 때, 필요한 수준의 힘으로 대응하기에는 그가 너무 어리다. 게다가 그에게는 팀을 위해 뛰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없다.”고 적을 정도였다. 

1958 월드컵 대표로 선발된 당시의 펠레 / nytimes.com

더군다나 펠레는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연습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당시 펠레에게는 카르발랴이스 박사의 혹평보다 무릎 상태가 더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브라질 대표팀의 페올라 감독은 찬반양론 속에서도 부상당한 펠레를 월드컵 대회에 데리고 갔다. 

펠레는 브라질의 3번째 경기인 소련과의 경기에 처음 출전했다. 8강전 웨일즈와의 경기에서는 드디어 첫 골을 넣었다. 1930 월드컵에서 멕시코의 마누엘 로사스를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득점자가 됐다. 펠레의 상승세는 4강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도 이어졌다. 아니 폭발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이다. 결승전에서도 2골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펠레는 1962년 칠레 월드컵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브라질 우승을 견인하였다. 역대 세 번 우승컵을 들어 올린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 월드컵 통산 12골(14게임)을 기록 현재 월드컵 득점 5위다. 
1977년 뉴욕 코스모스에서 은퇴하기까지 A매치 77골을 포함하여 통산 1,281골을 기록하였다. 리그 통산 총 655골을 기록하고, A매치 77골을 기록하였다. 해트트릭으로 기록한 골은 92골인데 이는 지금도 최고 기록이다.

브라질 스포츠부 장관직을 역임(1995~1998)하기도 한 펠레는 1999년 IOC에게서 ‘올림픽 100년 선수’에 선정되기도 하였다.‘축구 황제’로 불린 펠레는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중 2022년 12월 29일(현지시간)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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