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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해외

[5일 / 1975년 ] 윔블던 테니스 첫 흑인 남자 챔피언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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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테니스 4대 메이저의 하나인 US OPEN이 열리는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의 센터(메인) 코트 이름이 아서 애시 스타디움(Arthur Ashe Stadium)이다. 1997년 개장한 관중 수용 인원이 23,000여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테니스 경기장이다.

경기장 명칭인 아서 애시는 미국의 테니스 레전드 흑인 남성 선수의 이름이다. 1968년 아마추어 신분으로 US OPEN 남자 단식에서 첫 흑인 선수로 우승한 아서 애시(1943~1993)를 기리기 위해 센터 코트의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백인 스포츠로 불리는 테니스에서 인종의 장벽을 허문 그를 남자 테니스의 ‘재키 로빈슨’으로 부른다.

1943년 7월 10일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테니스를 시작했다. 고등학교에서도 뛰어난 테니스 실력을 보인 아서 애시는 테니스 선수 장학금을 받으며 UCLA에 입학하였다. UCLA에서 애시 아서는 1963년 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 컵(Davis Cup)에 흑인 선수로는 처음 선발되고 1965년에는 개인 및 팀 NCAA 챔피언십 타이틀을 따는 등 테니스 선수로서의 전국적 명성을 얻는다. 

아마추어 선수로서 1966년과 1967년 연거푸 결승전에 진출하여 준우승을 차지한 그는 US OPEN을 주최하는 미국잔디테니스협회(USLTA)가 1968년 초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서 그해 대회부터 87년간 지녀온 아마추어 전용 대회의 전통을 버리고 프로선수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1968 US OPEN에 아마추어 선수로서는 최고 시드인 5번 시드를 받고 출전한다(1~4번 시드는 프로선수). 그 대회에서 예상을 깨고 우승함으로써 그랜드슬램 최초의 남자 흑인 챔피언이 된다. 그런데 미 육군 중위 신분이었던 아서 애시는 우승상금 1만 4천 달러를 받을 수 없어 일당으로 20달러를 받아야만 했다.

아서 애시 / cmgww.com

US OPEN 우승 몇 개월 후 프로로 전향한 아서 애시는 1970년 호주오픈 남자 단식 우승, 1971년 호주 오픈 준우승 등 당시 세계 최고 선수로서의 성적을 올렸다. 1975년 31세의 나이 당시로서는 최전성기를 지난 아서 애시는 그랜드슬램 중 자신에게 가장 어려웠던 윔블던에 참가한다. 그전까지 아서 애시가 윔블던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은 1968년과 1969년 준결승전 진출이었다. 그런데 아서 애시는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그런데 결승전 상대는 당시 세계 최고 선수로 각광을 받고 있던 22살의 지미 코너스(Jimmy Connors)였다. 지미 코너스는 1974 윔블던을 우승한 디펜딩 챔피언이기도 했다. 대부분 전문가는 지미 코너스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아서 애시는 세트 스코어 3 대 1 로 지미 코너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윔블던에서 처음으로 남자 흑인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1980년 심장마비 증상을 겪고 나서 선수 은퇴를 한 아서 애시는 1979년과 1983년 심장 수술을 받기도 한다. 1988년에는 뇌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서 진찰을 받던 중 에이즈(AIDS) 감염이 발견되는데 심장 수술을 받을 때 수혈 과정에서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것이었다. 1993년 2월 6일 에이즈 관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서 애시는 선수 시절 선수의 권익과 흑인 인권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며 행동으로 실천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로테니스의 인기가 높아짐에도 선수들에게 지급하는 상금은 그에 따르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다른 선수들과 1969년 테니스프로선수협회(the Association of Tennis Professionals. ATP)를 결성했습니다. 오늘날의 ATP입니다. 1969년 남아공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는데 피부색 때문에  남아공 정부가 비자를 거부하자 이에 남아공의 테니스 투어 및 데이비스컵 출전을 허용하지 말자며 남아공의 흑인 억압 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전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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