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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국내

[4일 / 1920년] 제1회 전국체전이 배재학당 운동장에서 야구대회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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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2번 출구로 나와 덕수궁 대한문을 끼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정동제일교회 앞 회전 로타리에서 좌측 서울중앙지방법원 중부등기소 방향으로 약 100미터 가다보면 길 건너편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보인다. '신교육의 발상지'라는 글귀의 입구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 표지석 옆에 작은 표석이 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표석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졌다. "제1회 전국체육대회 개최지. 전국체육대회의 시초가 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1920년 11월 4일부터 6일까지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서울시가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체육대회의 효시가 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옛 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고보) 운동장(現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터에서 열렸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역사문화유적 표석이다(아래 사진)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년)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대한체육회가 발간한 '대한체육회 90년사'가 이 대회를 전국체육대회 기원으로 삼았고 전국체육대회 횟수를 기산하고 있기 때문에 명실상부 제1회 전국체육대회로 인정받고 있다.제1회 전국체육대회가 종합대회가 아닌 야구라는 단일 종목 대회로 열렸는지, 왜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는지 그 속사정은 이렇다(이하 내용은 '대한체육회 90년사' 참조).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 이듬해인 1911년 7월 일본체육협회를 창립했다. 메이지유신으로 조선보다 일찍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학교체육 보급도 조선보다 당연히 빨랐다. 일제는 1919년 2월 18일 서울에 있는 일본 체육인들로 '조선체육협회'를 창설했다. 조선체육협회는 조선총독부가 인정한 민간 체육단체가 돼 한반도 전체의 종합체육대회인 '조선신궁대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조선체육협회와 별도로 근대화의 물결을 앞서 경험한 도쿄 유학생들이 조선체육회 창립을 도모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이중국과 변봉현은 1919년 7월 서울에서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신양화점을 운영하던 이원용을 만나 조선체육회를 주동적으로 창립하기로 합의했다. 3인의 조선체육회 창립 운동에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조선체육회 창립할 적당한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3.1운동으로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고 한글신문의 창간을 허용하자 조선일보(1920년 3월 5일)와 동아일보(1920년 4월 1일)가 창간됐는데,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한 변봉현은 조선체육회 창립의 당위성에 관한 글을 4월 10일자부터 사흘동안 동아일보에 실었다. 제목은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아래 사진).

동아일보 아카이브

1920년 7월 13일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약 70여 명의 발기인이 모인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조선체육회는 대한제국 말기에 농상공부의 관직을 맡았고 일본에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1920년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국상업은행의 전신 천일은행을 설립한 장두현이 초대 회장에 추대됐고 8명의 이사가 선임됐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첫해인 1920년 가을 첫 행사로 체육대회를 열기로 하는데, 여러 종목 가운데 야구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조선체육회 창립을 주동했던 이중국, 이원용, 변봉현 등이 주로 야구인들이었고 1915년 일본에서 열렸던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에서 사용했던 야구 경기 규칙과 대회 운영 요강, 기록부 등을 가지고 있어서 야구 대회가 무난하게 치를 수 있는 대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회 경비와 대회 장소였다. 갓 창립된 조선체육회는 돈이 없었다. 사무실을 마련할 돈이 없어 이원용의 광신양화점과 이사진 집 사랑채 등을 떠돌아다니며 모임을 갖곤 할 정도였다. 장두현 회장을 비롯해 체육회 간부들이 100여 원씩을 내놓고 사회 유지와 회사, 상점에게서 기부를 받아 대회 경비는 마련했다.

대회 장소로는 당시 서울 용산철도국 야구장이 가장 좋았으나 빌릴 수가 없었다. 다음 후보지로 야구장으로 자주 쓰였던 훈련원 광장이 있었는데 공사 중이라 사용이 불가능했다. 결국 배재고보 운동장과 경성중학 운동장이 대체 후보지였는데 배재고보의 호의로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리게 됐다. 운동장은 지금의 JP모건 건물과 배재공원 터로 보인다.

1920년대 배재고보 운동장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대회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팀들만 참가했는데 중학단에는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앙고보, 배재고보, 보성고보 등 5개 팀이, 청년단에는 경신구락부, 천도교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 서울YMCA 등 5개팀이 출전했다. 대회 개막전 입장료를 받을 것이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는데 대부분의 학교 관계자와 이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육회의 유지 운영을 위해서는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는 조선체육회 재정 담당자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을 입장료로 받았다. 관중들이 예상보다 많아 대회 수입이 200원 정도에 이르렀다.개막경기는 애국지사 이상재 옹의 시구로 시작됐다(아래 사진). 대회 결과 우승은 중학단에서는 배재고보가, 청년단에서는 배재구락부가 차지해 첫 조선인야구대회에서 배재가 야구의 강호로 등극했다.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시구를 하는 이상재 옹(오른쪽) / 대한체육9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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